[한겨레칼럼] 전태일의 오랜 꿈은 그의 시대에 실현될까?[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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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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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한겨레칼럼]전태일의 오랜 꿈은 그의 시대에 실현될까?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입력2025.06.10. 오후 6:56 수정2025.06.10. 오후 7:30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1990년 대학을 졸업하던 해부터 몇년간 청계피복노동조합 문화학교 강사 일을 했다. 청계피복노동조합은 1970년 스물두살 청년 전태일의 분신을 계기로 만들어진 노동조합이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일요일은 쉬게 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젊디젊은 청년이 마지막으로 외친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요일은 쉬게 하라니,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요구인가만은, 그 시절 평화시장 봉제공장에 다니던 노동자들에게는 가장 절실하고 절박한 문제들이었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비롯해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투쟁으로 청계피복노동조합이 만들어졌고 온갖 탄압과 억압 속에서도 꿋꿋이 유지되어 이는 한국 노동운동의 주요한 한 축이 되었다. 지하철 동대문역 1호선 역에서 내려 십여분 걸어가면 노조 사무실이 있었다. 문화학교는 노동조합에서 가장 말랑말랑한 조직이었다. 한문반, 노래반, 풍물반, 미술반, 문학반이 있었고 나는 문학반 강사 일을 했다. 한문반은 문화학교에서 가장 유서 깊은 모임이었다. 한문으로 쓰인 근로기준법을 독학으로 공부하기가 너무 어려워 해설서를 구해 읽었지만 그마저 한문투성이 법률 용어가 많아 힘들게 공부했던 전태일의 이야기는 당시 대학생들에게 죄의식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 그 맥락은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는데 한겨레신문이 창간되기 전 대부분의 한국 신문들은 한자와 한글을 섞어 썼고 관공서의 주요 서식들도 한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시작한 공장 노동자들에게 그러므로 한문반은 유용한 공부 모임이었다. 노래반과 풍물반이 인원도 많고 떠들썩하고 유쾌했던 반면 문학반은 소수였고 조용한 집단이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 서로의 글을 읽고 합평하고 계절에 한번씩 문집도 만들고 엠티도 가고 아주 가끔 작가를 초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하루 일을 끝내고 실밥을 떼내며 늦은 밤 노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미싱사 시다 재단사들, 영분이 애순이 은자 옥자 향정이 은예 영숙이 …는 짬짬이 틈틈이 공들여 써온 각자의 글을 한편씩 꺼내놓았다. 곰살곰살 그러나 타협하지 않고 글에 대한 합평을 했다. 우리는 문학반이었으므로. 문장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계급에 대한 이야기, 구성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사회적 모순과 불평등에 대한 이야기, 인물의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노동자 계급의 당파성에 대한 이야기, 살아온 날들의 고단함과 살아갈 날들에 대한 고민, 글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삶에 대한 이야기, 도란도란, 그런 시간이었다. 돌아보면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취직해 가족을 부양하고 오빠의 대학 등록금을 대고 아버지의 약값을 대던 딸들의 서사는 그 시절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 거 같다. 영분이는 해남이 고향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해, 중학교를 보내달라고 일주일 내내 아침마다 변소 앞에서 아버지를 졸랐다. 형제자매 많은 집에서 아버지를 독대할 시간이 그때뿐이었기 때문이다. 한달 뒤 아버지는 영분이의 손을 잡고 서울로 왔고 영분이 첫번째로 취직한 곳은 창동에 있는 샘표공장이었다. 열네살부터 세상살이를 시작한 영분이는 스무살 즈음 평화시장의 미싱사로 일하고 있었다. 애순이는 정선 사람이었다. 팔남매인가 구남매 중에 다섯째인가 여섯째인가 그랬다. 중학교를 마치고 담임 선생님의 주선으로 청계천 봉제공장에서 시다로 일하다가 가봉 작업을 맡는 인타사가 되었다. 월급을 모아 오빠의 대학 등록금을 댔다. 은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했는데 오빠가 청계피복노동조합 선전부장이었다. 은자가 썼던 남산타워라는 멋진 시는 지금도 생각난다. 피부가 하얗고 덩치가 큰 향정이도 문학반에서 글을 썼다. 향정이의 이삿짐을 나르던 날, 리어카에 짐을 싣고 좁디좁은 골목길을 누비며 도착하니 대문 옆 문간방이 향정이가 얻어 놓은 셋방이었다. 꽃무늬 비닐옷장 하나 놓고 향정이가 누우니 딱 맞았다. 은유가 아니라 실제다. 향정이는, 일찍 죽었다. 고향에 내려갔다는 소식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온 부고였다. 11월엔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마석 모란공원에 갔다. 그곳에 전태일의 무덤이 있었다. 기차 한량에 노조원들이 모두 같이 타고 갈 때면 야유회를 가는 것처럼 흥성스러웠다. 바위처럼 살아가리라, 우리 문학반의 영숙이가 노래를 하면 뺨이 오동통한 선전부의 복희가 의자 위에 올라가 춤을 추었다. 이소선 어머니는 아들이 죽은 그해부터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모란공원에서 아들의 말을 전했다. 지금 누구의 말도 듣지 말고 내 말만 들어요…. 내가 다 못한 일을 엄마가 해준다고 내게 약속해 주세요. 어머니는 뼈가 가루가 되도록, 이것도 은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그 일을 했다. 이소선 여사는 이제 아들 곁에 나란히 누워 있다. 이소선 여사가 하던 그 일은 지금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죽은 김용균의 어머니가 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날 개표 방송을 보며 이재명 후보가 유력에서 확실로 굳어지는 순간 눈가가 뜨듯해졌다. 우리도 노동자 출신 대통령을 갖게 되는구나.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왜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냐는 질문에 우리도 노동자 출신 대통령을 한번 가져보면 좋겠어서, 라고 나는 진심으로 대답했다. 핀란드에서 만난 사람들은 자신들의 대통령 이야기를 할 때면 마우노 코이비스토 얘기를 하곤 했다. 목수와 항구 노동자로 일하다가 은행 총재를 거쳐 핀란드 대통령이 된 사람, 핀란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진심으로 부러웠다. 개표방송을 보다 새벽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누우니 청계피복노동조합의 옛 동무들이 떠올랐다. 빨간꽃 노란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돌아가던 미싱, 공장의 불빛. 소년 노동자 이재명도 그 시절 그 얼굴 중에 하나였으리라. 전태일의 오랜 꿈은 그의 시대에 실현될까? 이재명 대통령이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자신의 계급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가난했던 옛 기억을 잊지 않고 고단했던 시절의 절치부심 다짐을 되새기며 공직을 수행하기를 희망한다. 우리에게도 노동자 계급 출신의 대통령이 있다. 한겨레 hanidigitalne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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