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노동운동의 전기, 전태일 열사
- 관리자
- 2025.08.04
- 조회수 71




노동운동의 전기, 전태일 열사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열전 5]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주세요" 1970년 11월 13일 낮 1시 30분경,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한 청년이 전신에 뿌린 석유로 불에 타면서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절규하면서 쓰러졌다.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아무도 덤벼들어 불을 끄지 못하고, 전신에 치명적인 화상을 입은 청년은 병원에 실려 갔으나 끝내 회생하지 못한 채 산화하였다. 청년의 분신은 한 무명 근로자의 죽음이었지만, 이후 한국사회에 미친 파장은 가히 태풍급이었다. 박정희 독재정권이 재벌을 키워주고 악덕기업주들은 권력과 결탁하면서 정치자금을 바치고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먹이사슬 구조에서 터저나온 저항의 불꽃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하여 권리 위에 잠자던 노동자들이 깨어나고 현대적인 노동운동의 전기가 되었다. 한국노동운동의 새장을 열었다. 청년의 이름은 전태일, 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전상수와 이소선 사이에서 태어났다. 6·25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갔으나 봉제 기술자였던 아버지의 파산으로 54년 가족이 모두 서울로 올라왔다. 전태일은 집안의 가난 때문에 거의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남대문초등학교 4학년에 다닐 때 학생복을 제조하여 납품하던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고 큰 빚을 지는 바람에 학교를 그만두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동대문시장에서 물건을 떼어다 파는 행상을 시작했다. 그러다 17살 때 학생복을 제조하던 청계천 평화시장의 삼일사에 보조원으로 취직하였다. 일찍이 아버지에게서 재봉 일을 배웠던 전태일은 기술을 빨리 익혀서 66년에는 재봉틀을 다루는 재봉사가 되어 통일사라는 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이 무렵 빚 때문에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도 다시 모여 살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전태일이 일하던 청계천의 평화시장은 인근의 동화시장, 통일상가 등과 함께 의류 상가와 제조업체가 밀집되어 있는 곳이었다. 좁은 공간에 다락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밀집시켜 일을 시키다보니 노동환경이 극히 열악했다. 노동자들은 햇볕도 비추지 않는 좁은 다락방에서 어두운 형광등 불빛에 의존해 하루 14시간씩 일을 했다. 환기 장치가 없어서 폐질환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젊은 여성이었는데, 특히 '시다'라고 불린 보조원들은 13~17세의 어린 소녀들로 초과근무 수당도 받지 못한 채 극심한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노동법이 있었지만 이들에게는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전태일은 자신이 가난과 중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함께 일하던 여성 노동자가 폐렴에 걸린 상태에서 해고되자 그를 도우려고 애쓰다가 자신도 해고되기도 했다. 이웃의 아픔을 함께하고 어려운 일에는 앞섰다. 이후 전태일은 재단사 보조를 거쳐 상대적으로 괜찮은 대우를 받던 재단사가 되었으나 동료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68년에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어 그것을 공부하면서 대부분의 회사가 실정법 조차 지키지 않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지를 더욱 다지게 되었다. 69년 6월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친목단체 '바보회'를 만들어 설문으로 평화시장의 노동환경을 조사하며 인근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내용을 알렸다. 이같은 사실이 사업주들에게 전해지면서 전태일은 해고당하고 평화시장에서 일할 수 없게 되었다. 한동안 막노동을 하며 지내던 전태일은 70년 9월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삼동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다시 노동환경 실태를 조사하는 설문지를 돌려 노동청, 서울시, 청와대 등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이러한 내용이 한 신문에 실려 사회적 주목을 받자 삼동회 회원들은 노동환경 개선과 노동조합 결성을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행정기관과 사업주들의 조직적인 방해로 무산되고 말았다. 행정기관들은 노동자들보다 업주들의 편이었다. 그래서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은 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벌여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을 고발하기로 했다. 경찰의 방해로 시위가 무산되려는 상황에 놓이자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병원에 실려간 전태일은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날 세상을 떠났고, 장례식은 11월 18일 노동단체장으로 엄수되어 남양주 마석의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의 유언에 따라 죽을 때까지 '노동자의 어머니'가 되었다. 전태일(全泰壹)은 자신의 몸을 던져 "모두가 크게 하나 된다"는 이름대로 노동자들의 영원한 친구가 되었다. 그의 죽음으로 70년 11월 27일에는 70년대 최초의 민주노조인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노동조합이 태어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그의 헌신은 한국 노동운동의 새로운 계기가 되고 노동자들이 크게 각성하는 역사의 사건이었다. 박정희식 경제정책인 선성장 후분배의 논리에 입각한 고도성장책의 해독과 일선 노동자의 참상을 정면으로 고발한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은 70년대 이후 한국 기층사회의 저항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긴 세월 순응과 인고로 순치된 노동자들이 권리를 주장하는 주체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전태일은 하루 14시간이 넘는 고된 노동 속에서도 독서와 일기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쓴 일기는 많이 파손되고 유실되었지만 평화시장에서 일하면서 쓴 일기는 상당부분 남아 있다. 그의 일기와 편지, 관계기관에 보낸 진정서 등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돌베개, 1988)라는 책으로 정리되었으며, 일기와 주변 사람들의 구술 등을 기초로 그의 삶을 기록한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돌베개, 1983)이 간행되어 노동자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큰 각성을 주었다. 95년에는 그의 삶을 영화로 옮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박광수 감독)이 국민모금 방식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그가 자신의 몸을 불태웠던 청계천 6가의 '버들다리'위에는 2005년 그의 정신을 영원히 기리는 반신 부조가 설치되었다.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 주게.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 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이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돈의 힘)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 전태일의 '유서' 전문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530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