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 청년 전태일 > 그의 일대기 > 노동운동가의 삶

노동운동가의 삶 (1965~1970)

1965.08
서울에서 뿔뿔이 흩어져 살던 가족은 우연히 다시 모이게 되고,
평화시장 삼일사에 견습공(시다)으로 취직하여 첫 임금노동자 생활을 시작
1966.02
남상사를 거쳐 통일사에 미싱사로 취직, 참혹한 노동 현실을 개선하고자 재단사가 되기로 결심
1966.10
재단보조로 한미사에 취직하여 재단사로 승진, 업주들의 횡포와 착취구조를 알게 되고
이에 저항하기 위해 체계적인 근거를 마련하는 한편 차비를 털어
배를 곯는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주는 등 현실 고통을 해결하고자 노력
1967.06
고입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중 아버지를 통해 근로기준법을 알게 되고
자신의 출세와 학구열보다도 어린 여공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그토록 열망하던 공부를 과감히 포기
1969.06
재단사들의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고,
회원들과 노동법을 공부하며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시청과 노동청에 진정하였으나 좌절
1969.09
활동자금 부족과 성과 미흡으로 바보회 활동이 정지되고,
공장에서 해고되자 건축 막노동을 하면서 앞날을 도모.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라는 소설형식의 글 작성
1969.11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진정서 작성
1970.01
모범업체 설립 계획서 작성과 설립자금을 위해
중앙일보 사회면 '주사위'란에 안구 기증자를 찾는다는 편지 발송
1970.04
임마누엘수도원 건축공사장에서 막노동하며 죽음을 각오한 번민과 결단
‘사랑하는 친우여.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태일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라는 편지글 작성
1970.08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나는 돌아가야 한다.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라는 글 작성
1970.09
임마누엘수도원 하산과 삼동친목회 조직. 실태조사서 작성하여 동양방송 고발프로, 시청, 노동청 진정 등 투쟁의 시작
1970.10
경향신문 석간 사회면에 평화시장 실태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 보도와 사장 면담투쟁, 노동청 진정과 시위 투쟁
1970.11.13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치르기로 한 날 집회, 시위가 경찰에 의해 막히자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며 분신 항거.
메디칼센터(현, 국립의료원) 응급실로 이송하여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14일 오전 1시 30분 임종.
어머니와 친구를 향한 유언
“엄마, 내가 못다 이룬 소원들을 엄마가 제 대신 이루어 주세요.”
“엄마는 이제 그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뚫어 놓은 작은 바늘구멍을 자꾸 넓혀서 그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친구들아.절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줘라.”
1970.11.18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
위로가기